1. 이상한 마법사의 정원 (1)
시간강사와 유급생의 론도(http://honora.tistory.com/74) 1편... 일지 아닐지 모를 이상한 물건입니다.
銀 님께 바칩니다.
1. 이상한 마법사의 정원
키릴 나이트하르트는 이른 아침 눈을 떴다. 그는 아무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팔을 한 번 움직여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잠들기 전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 있었던 품은 텅 비어 있었다. 그가 가운을 대충 주워 걸치고 방을 빠져나가 홀로 내려가니 예상대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보리를 더 심어 보려고. 이쪽 길을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내 생각엔 뱃길을…….”
그는 한숨을 쉬며 인기척을 냈다.
“유진.”
이름을 부르자, 아침부터 탁자에 책과 서류를 펼쳐 놓고 열변을 토하던 밤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이쪽을 돌아 보았다. 동그랗고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아, 키릴. 잘 잤어? 좋은 아침.”
“있잖아, 유진 양. 우리 결혼한 지 겨우 사흘쯤밖에 안 됐거든.”
“정확히는 일주일 됐는데. 근데 그게 왜?”
“그게 왜, 가 아니잖아.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침대를 빠져나가야 해?”
투덜거리며 다가와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싸 안자 유진을 상대하고 있던 젊은 서기관이 얼굴을 붉힌 채 물러섰다. 키릴이 정식으로 아내가 된 유진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추자, 그녀는 아직도 어색한 듯 몸을 살짝 움츠렸다. 도망치려는 것을 붙잡아 등 뒤에서 껴안고, 그는 눈 둘 곳을 찾아 헤매는 서기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저는 그럼 이만…… 흠, 물러가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거의 날듯이 도망쳐 버리는 서기관을 향해 손을 뻗다가, 유진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좀 놔 줄래? 키릴.”
“싫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유진은 웅얼거리면서 그의 손을 풀어 내려고 했지만, 등 뒤에서 껴안은 남자는 오히려 팔을 허리에 빙 두르더니 머리 위에 고개를 올려 놓았다. 그녀는 버둥거렸다.
“부끄럽단 말이야.”
“아침부터 다른 남자랑 일 얘기나 하고 있는 네가 나빠.”
“일 해야지. 마침 잘 됐다. 키릴도 이거 한 번 봐 줄래? 계산은 맞을 것 같지만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몰라서 규모는 절반 정도로만 갈 거야. 음…… 더 줄이는 게 좋을까? 지난 번에 말했던 그 작물 문제인데…… 키릴, 듣고 있어?”
“그러니까, 유진 양. 우리 결혼한 지 겨우 사흘 됐거든.”
“일주일이라니까?”
“아무튼!”
겨우 팔을 풀어내고 한 발 물러선 후, 유진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를 향했다. 한 마디 해 줄 작정이었지만 무어라고 말을 떼기도 전에 그는 잿빛 눈동자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웃고,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사랑해.”
“어, 어어……?”
기습이다.
유진은 뭐라고 대답하지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그녀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무사히 결혼해서 기뻐.”
“잠, 잠깐만 키릴 갑자기 왜…… 꺅!”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너무하네. 그 반응. 이럴 땐 ‘나도 기뻐’ 라고 말해 주면 좋잖아.”
“그건…… 그, 러니까…… 물론 나도 엄청 아주 많이 진짜 기뻐. 그러니까 내 말은…….”
“모처럼이니까 말해 줄래? 사랑해, 라고 해줘.”
“어어…….”
부끄럽다.
아주 매우 몹시 정말 부끄럽다.
유진은 두 팔을 뻗어 자신의 남편이자, 일로린 영지의 주인인 남자의 옷가슴을 떠밀었다. 그는 어린 병아리 뒤를 쫓는 고양이처럼 유쾌한 얼굴로 웃었다.
“말해 줘, 응? 유진 양.”
“자, 자주…… 하잖아. 그, 저기 키릴, 일단 이거부터 보고…….”
“일은 나중에 하고, 어서. 응?”
허둥지둥 들어 올렸던 서류를 빼앗기자 유진은 새빨개지다 못해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완고하게 입을 다물었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나중에…… 나중에 할게!”
“어디서? 언제? 침대 위에서? ……뭐 그것도 괜찮네!”
따위의 낯뜨겁다 못해 비겁한 소리를 뻔뻔하게 하면서 그는 그녀를 덥석 들어 올렸다. 그녀는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 보다가, 체념하듯 목을 끌어 안았다.
“키릴은 좀 더 담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충분히 담백하지 않아?”
“전혀!”
“아, 그래? 아니어도 괜찮지, 뭐.”
“괜찮지만…… 잠, 깐! 잠깐 키릴 진짜 침실로 가는 거야? 아니지? 지, 지, 지금 아침이거든!”
“결혼한 지 겨우 사흘밖에 안 됐다니까? 유진 양.”
“일주일이거든!”
유진은 여고생이던 시절 갑자기 이쪽 세계로 불려왔다. 사고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일로 전혀 모르는 대마법사의 손에 떨어진 그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대마법사는 그녀를 덜렁 용의 등에 태워 수제자에게 보내 버렸다. 그녀는 울었고, 수제자—키릴을 만났다.
일로린 백작이자 대륙 북부의 총관. 대마법사의 제자로 누구보다도 대마법사에 가까운 남자, 라는 어이없을 만큼 거창한 별명들이야 어떻든 키릴은 그녀를 친절하게 돌봐 주었다. 돌봐 주었을 뿐 아니라 일 년이 지난 후에는 연인이 되었고, 또 이 년 후에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부부…… 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약혼녀로 신분이 바뀌기 전에도 그 후에도 계속 대륙 전체를 놓고 보면 변방에 가까운 웜우드 저택에 틀어박혀 지낸데다 키릴도 그다지 남과 교류하는 성격이 아닌 탓에, 그녀에게는 매사가 좀 소꿉놀이 같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의외라고 할까, 제대로…… 제대로 부부처럼 지내고 있잖아?’
그러니까, 한 침대에서 잠든다든가 하는 것.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키릴 쪽에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이름을 부르고 그대로 다시 입맞추는 바람에 익숙해진다기 보다는 밀어붙여져서…….
‘아, 몰라.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니 무섭다. 아니, 그것보다도 키릴이…… 키릴이 이렇고 저렇고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인 것 쪽이 더 무서워. 싫……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펜을 쥐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던 유진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점심이 지난 시간에야 겨우 일을 시작한 참이었다. 수십 수백 개의 숫자와, 지명과,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머리로 열이 펄펄 끓게 만드는 ‘남편’에 대해 한참 고민하자니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야, 유진 양. 그렇게 경계하는 얼굴로 보는 건 너무하잖아? 상처 받는다고.”
“그랬어? 미안해, 키릴. 그보다 용건이 뭐야?”
“달콤한 말 한 마디도 없이 ‘용건이 뭐야’ 라니 찬바람이 쌩쌩 부네. 날 싫어하는 왕비님도 그런 식으로는 말 안 할걸.”
“……용건이 뭐냐니까?”
“뭔가 가지고 싶은 것 없어? 하고 싶은 거라든가.”
“응? 없는데?”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사소한 거라도 좀 생각해 봐. 결혼선물을 해 주고 싶어.”
“난 줄 게 없으니까 키릴도 안 줘도 돼.”
“나도 받을 테니까 너도 받는다는 선택지는 없어? 아가씨.”
“으음…….”
아무래도 없지만, 유진은 고민하는 척 팔짱을 꼈다. 예전에 한 번은 꽤나 진지하게, ‘원래 세계의 학교랑 집에 가 보고 싶어’ 라고 말해 봤지만 몹시 정중한 사과를 받고 말았다. 키릴이 일부러 해 주지 않는다기 보다,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건너올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한 게 문제였다.
돌려보낼 수 있지만, 다시 키릴의 곁으로는 올 수 없으니 시도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그에게는 꽤나 뼈아픈 것이어서, 키릴은 보기 드물게도 의기소침해졌고 유진은 오히려 그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키릴에게 돌아올 수 없는 건 싫으니까.]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딱히 없…… 잠깐만. 키릴 지금 뭐 하는 거야?”
“유진 양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데?”
“키릴, 바쁜 것 아니었어?”
“바쁘니까, 짬을 내서 만지러 온 거잖아.”
당당하게 답하면서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유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물론 좋아하지만, 누구보다도 좋아해서 태어나서 자란 고향과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도 포기했을 정도지만, 하지만 부끄럽고 성가셨다.
“정원.”
그래서 그녀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정원?”
“응, 정원. 지금도 예쁜 장미원이랑 밭이 있지만, 저택 고쳐 지으면서 뒤쪽에 빈 땅이 생겼잖아? 그쪽에 꽃도 심고 연못도 만들고, 그리고…… 아, 분수 같은 것도 있으면 좋겠어.”
“정원이라…… 네가 과실수를 좋아하니까 배나무하고 사과나무를 좀 심고 꽃은…… 좋아, 마침 좋은 게 떠올랐어.”
“기대할게.”
그녀는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키릴은 할 일이 눈 앞에 있으면 상당히 집중력을 발휘하는 타입이었으므로, 그녀는 당분간 자유롭고도 한가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마님,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틀 후, 저녁 무렵.
유진은 그녀 자신도 이미 눈치 챈 문제에 대해 시녀장의 보고를 받아야만 했다.
“주인님께서 귀가하지 않고 계십니다. 저택 북쪽의 공터에 계시리라 추측합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
곧바로 정원을 만드는 일에 몰두해, 불필요할 만큼 방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 일로린 백작께서는 이틀 후까지도 돌아오지 않으셨던 것이다.
“사람을 보내서 찾아오면…… 안 되겠구나. 응. 미안해.”
시녀장 포티나의 안내를 받아 북쪽 공터, 아니 공터였던 곳으로 간 유진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도대체 키릴은 얼마나 쓸데없이 천재인 거야?’
공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눈으로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미로 정원이 거기 펼쳐져 있다. 입구를 장식한 아치 곁으로는 벌써 들장미 넝쿨이 늘어섰고 온갖 동물 모양으로 정리된 토피어리가 난간을 이루었다. 이런 대륙 북쪽까지 필 리가 만무한 여름 꽃들이 색색별로 줄지어 만발한 가운데 유진이 발을 들이자 멀리에서 새들이 날아 올랐다.
“……음, 조금 기다려 줄래? 내가 가서 찾아 올게.”
“식사 시간 전까지 돌아와 주십시오.”
“노력할게.”
유진은 웃으며 시녀장과 작별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역시, 그것이 문제였다.
그녀의 남편은 정말이지 ‘쓸데없이’ 천재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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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잘때 잠깐씩 쓰느라 ㅠㅠ 가볍게 쓰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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