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은 http://honora.tistory.com/94
여기.
가볍게 썰 풀다 썰 푼 데까지 써본 거라 뒤는 없습니다. ㅠㅠ
銀 님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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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동네 같은데.’
유진은 기가 막혀서 걸음을 멈췄다. 아기자기하게 가꾼 화단도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고, 적당한 크기의 공터 저편으로는 칙칙한 회색 건물도 서 있었다. 일부러 꾸민 정원은 맞는 것 같지만 저택보다는 어딘가의 관공서에나 어울릴 법한 분위기였다.
그녀는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키릴이 그녀를 위해 이렇게나 열심히 준비해 준 것은 물론 고마웠지만,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몇 발 더 걸어가던 그녀는, 발 밑에서 무언가가 바사삭 부서지는 감각에 다시 멈추어 섰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누군가가 그리다 만 마법진이 보였다.
정남향의 신성한 성좌가 크고 작은 걸로 셋. 그 곁으로 외쉐젤의 닻. 마법사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백합이 두 송이. 엇갈리듯이 꽂힌 네 자루의 창과 거꾸로 매달린 깃발.
유진의 발 바로 아래에는, 마법진의 요소들을 표시하기 위해 놓아 두었음직한 나뭇가지가 부러진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녀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외쉐젤의 닻 위로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런 경우에는 보통은…….’
그녀는 손을 뻗어 미완성된 것인지 아니면 망쳐 버린 것인지 모를 마법진을 제 나름대로 덧붙여 그렸다. 자나 다른 도구 없이도 제법 반듯하게 그은 사선과 오각형, 팔각형이 겹치고 이어지고 변형되어 갔다.
“어째서 북동쪽에 검 대신 활을 그리는 건가?”
목소리에, 유진은 반짝 고개를 들었다.
“키릴!”
반가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달랐다.
조금.
“……자네는 누구지?”
아니 많이.
낯익은, 누구보다도 그녀가 사랑했던, 사랑하고 있는, 단정한 잿빛 눈매가 찌푸려졌다. 희고 반듯한 콧날과 웃을 때면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입매도 그대로였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일종의 ‘경멸’이었다.
유진은 웃음을 거뒀다.
“누구냐고 물었네만, 신입생 양.”
신입생…… 양?
그냥 ‘많이’ 다른 정도가 아닌 것 같다.
유진은 당황해서 제 발치를 얼른 내려다 보았다. 고개를 숙인다기 보다는 거의 머리를 떨어뜨리는 것 같은 기세로. 잠깐 정원에 다니러 가기 위해 신었던 슬리퍼는 간 데 없이, 값싸고 튼튼한 감색 구두가 발에 꿰어진 채였다.
“어…… 어라?”
무릎까지 치렁하게 늘어진 헐렁한 포도줏빛 로브도 못 보던 물건이긴 마찬가지다. 거기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어깨를 넘어 무슨 밧줄처럼 뚝 떨어지는 것은…….
“헉! 으아, 앗! 앗! 으와! 키, 키릴! 나 머리! 머리 길었어!”
그렇다. 그녀의 머리카락이었다. 이 세계로 올 때 짧은 단발이었다가, 조금 길었다 싶으면 끝을 다듬기를 반복해서 일로린 백작 부인이 된 지금도 겨우 어깨를 살짝 덮는 정도였던 머리카락이 보란 듯이 땋아 내려져 등 한 중간까지 닿고 있었다. 유진은 기가 막혀서 소리를 쳤다. 그러나 눈 앞의 남자, 즉 그녀의 소중한 ‘반려자’였던 키릴 나이트하르트는 더더욱 불쾌한 표정으로 한 발 물러서더니 포켓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난 또. 안경이었구…… 나……? 응? 안경?’
놀랄 일 투성이다.
이제 놀랄 힘도 없다.
유진은 눈을 끔벅거리며 키릴을 올려다 보았다. 백금색 둥근 테가 달린 안경 너머 가늘게 뜬 눈매가 아름다웠다.
역시 우리 남편, 안경도 잘 어울리는구나!
같은 소리는 죽어도 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도전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장난은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냐는 무언의 항의를 담아서. 그러나 그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시선을 돌려 보냈다.
“신입생 양, 아니 고쳐 말하지. 유급생 양. 자네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거라면 그걸로 됐네. 나는 다만 자네의 흥미로운 마법진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싶었을 뿐이야.”
“유급생…… 양?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백작님.”
그녀 역시 한껏 빈정거려 주었다. 슬프게도, 그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그 목깃에 단 리본이 신입생 용이고, 손에 쥔 짧은 로드는 두 군데 부러져 수리했으니 자네는 적어도 삼 년간 이 아카데미아에서 신입생이었다는 뜻이 되겠지. 아닌가?”
로드?
와, 세상에. 정말 손에 어느 틈엔가 막대기를 하나 들고 있었다.
유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여긴 어딜까.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그녀는 고민하는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남편은, 그래, 눈 앞에 서 있는 이 키릴 나이트하르트는 세상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다. 대마법사에 한없이 가까운 남자. 마법진을 그리는 것만으로 대지를 뒤흔들 수 있는 사람.
“네, 뭐 당신 말씀대로 저는 지금 신입…… 유급생이라는 설정 같네요.”
그러고 보니 키릴의 얼굴이 약간이지만 앳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 자신 역시 그럴 터였다. 유진은 로드를 들어 툭툭 왼쪽 어깨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학교에 가 보고 싶어.]
그렇게 말한 기억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원래 세계의 학교와 집’이었다.
이렇게 심술궂은 설정이라니 도대체 키릴은 어쩔 작정인 걸까.
“그럼 이만 실례…….”
“하지만 당신이 틀렸어요.”
“……무슨 의미지?”
“북동쪽에 왜 검 대신 활이냐고 물어보셨는데, 그건 검을 그려야 했다는 뜻이시죠? 만약 그렇다면, 그 말씀이 틀렸다는 거예요.”
이 설정이든 저 설정이든 키릴은 키릴이었다. 그는 ‘천재니까 대충 그러하겠지’ 하고 주위에서 짐작하는 바와는 사뭇 다르게도 마법 연구에는 진지했다. 그녀는 본의 아니게 세계 최고의 마법사 바로 곁에서 반쯤은 조수 역할을 해내야 했으므로, 키릴의 연구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유진이 만약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세계에서 다섯 번째쯤은 위험한 사람이었을 거야.]
우스개 삼아 그렇게 놀리던 목소리에도 애정이 듬뿍 묻어 있던 남자였건만, 하룻밤 만에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더 듣고 싶으신가요, 백작님?”
그녀가 묻자,
“아주 흥미롭군. 유급생 양.”
그는 답하며 팔짱을 꼈다.
“이 마법진은 짐작하건대 이 일대에 비구름을 불러오려는 거예요. 신성한 성좌는 바람. 닻은 구름의 방향을 의미하죠. 검은 피, 거꾸로 매달린 깃발은 죽음의 선포예요. 이것들의 의미는 희생제물이고, 그리하여 비를 머금은 구름이 허락되는 거지요. 하지만 여기 검이 이미 지상에 꽂혀 있기 때문에 하늘에는 다시 심판이 필요하지 않아요. 다시 검을 그리면 그건 복수의 연쇄가 되니까 깔끔하지 않아요. 하지만 활은 겨눌 뿐, 절대로 시위를 놓지 않으면 단순한 경계를 의미할 뿐이잖아요? 즉, 구름이 출발하는 장소에는 검보다는 활이 어울리는 거예요.”
잘난 척 떠들면서 유진은 양심이 따끔거렸다. 어차피 키릴의 마법진들을 베끼거나 정리하거나 도우면서 알게 된 것들에 불과했으니까. 그걸 흡사 제가 다 알아내기나 한 것처럼 늘어놓자니 부끄러웠다.
“단순한 경계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건 나 정도 되는 마법사에게나 가능한 거지. 유급생 양, 자네 같은 풋내기들은 검을 스무 자루쯤 꽂아 한없이 피를 흘려도 비구름은 오지 않을 거야.”
피식, 웃으며 그는 우아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마법진은 청보랏빛으로 반짝이더니 하늘을 향해 번개를 내리질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온도가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축축한 흙 냄새가 났다.
키릴은 미쳐 날뛰듯 불어 닥치기 시작한 폭풍을 등진 채 미소 지었다.
“그래서? 유급생 양은 누구지? 어째서 허락 없이 내 이름을 불렀던 것인지 알고 싶은데.”
유진은 때로 그의 청람색 머리카락이 별을 가득 머금은 밤하늘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다 타버린 재처럼 그윽한, 항시 고요하여도 실은 누구보다도 다정한 눈동자가 사랑스럽다고도. 그러나 그는 지금 여실한 경멸과 경계로 낯을 굳힌 채 그녀를 뜯어 보고 있었다.
“저는.”
당신의 아내예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저는 당신의 약혼녀예요.”
그 말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혐오와 조소가 한꺼번에 그의 눈에 떠올랐다.
‘역시 아내라고 안 하길 잘 했어.’
그녀는 두 군데 부러져서 보수한, 잘은 몰라도 싸구려일 것이 분명한, 짧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엄청 골치 아픈 상황에 휘말린 것 같아.’
이게 다 그녀의 남편이 쓸데없이 천재인 탓이 틀림없었다.
“자네가, 내, 약혼녀라고 말했나? 이름도 모르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유급생 양?”
그 천재 남편께서 대단히 짜증난 목소리로 입을 여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는 정말 한심하군.”
“짜증나면 짜증난다고 하면 되지 한심할 건 또 뭐예요?”
“건방지기까지.”
“와.”
그녀는 해서는 안 될 말을 급히 삼켰다.
‘뭐라는 거야? 키릴이 제일 건방지거든.’